이주하시는 하나님, 이주하는 우리

장유 힐링교회 주일예배

히브리서 11장 8-10절, 13-16절

서론: 우리는 모두 ‘이주민’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장유 힐링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는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 ‘이주민’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 이곳 장유에 새로운 가정을 꾸리셨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미혼에서 기혼으로, 자녀에서 부모로, 삶의 역할과 환경이 끊임없이 변하는 ‘내적인 이주’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 우리 모두는 이 땅이라는 잠시 머무는 정거장을 떠나 영원한 본향,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영적인 이주민’입니다.

오늘 저는 ‘이주하시는 하나님, 이주하는 우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이 땅에서 우리의 진짜 정체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정체성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와 평안을 얻고, 천국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힘과 지혜를 얻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론 1부: 하나님은 스스로 ‘이주’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저 높은 하늘 보좌에 가만히 앉아 계신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결코 한곳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주’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주’의 역사입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의 이주, ‘창조’입니다.

영원 전부터 완전하고 충만하신 성부 하나님은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아무것도 없던 텅 빈 혼돈의 공간으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즉, 당신의 영광과 생명으로 이 세상에 ‘이주’하시어, 빛을 만드시고 이 아름다운 우주와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사랑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첫 번째 이주였습니다.

둘째, 성자 예수님의 이주, ‘성육신’입니다.

인류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원한 죽음에 처했을 때, 성자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고 이 땅의 가장 낮고 천한 곳, 말구유로 ‘이주’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사건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배고픔과 슬픔, 아픔과 죽음을 친히 겪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주는 우리를 살리기 위한 가장 위대한 희생의 이주였습니다.

셋째, 성령 하나님의 이주, ‘내주(內住)’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다시 이주(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우리 각자의 심령 가운데로 ‘이주’하여 오셔서, 지금도 우리 안에 집을 짓고 살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가르치고,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스스로 나그네가 되시고, 이주자가 되시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와 담대함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방황할 때조차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함께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본론 2부: 우리는 ‘영적 이주민’으로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주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역시 ‘이주하는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말씀은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통해 ‘영적 이주민’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각인시켜 줍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히브리서 11:13

믿음의 조상들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았지만, 그들의 마음과 시선은 늘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았고, 스스로를 ‘외국인’과 ‘나그네’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영적 이주민’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장유 시민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영적인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은 우리가 잠시 거쳐 가는 정거장일 뿐, 우리의 영원한 집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깨닫고 우리의 존재에 깊이 각인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며, 천국 시민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론: 천국 이주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땅에서 ‘영적 이주민’으로, ‘천국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의미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네 가지 삶의 방식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첫째,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가볍게’ 살아갑니다.

이 땅의 성공이나 재물, 명예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알기에, 그것들에 우리의 인생 전부를 걸지 않습니다.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가 불필요한 짐을 꾸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힐링’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둘째, 가는 곳마다 ‘예배의 제단’을 쌓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장막 옆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우리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업터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예배의 장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곧 예배가 될 때, 우리는 이주하는 삶의 고단함을 이기고 날마다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 우리 곁의 모든 이주민을 ‘따뜻하게 환대’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영적 이주민’임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우리 곁에 있는 또 다른 이주민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타국에서 온 이주민 근로자들, 결혼 이주 여성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우리가 섬겨야 할 단순한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료 나그네’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 우리를 품어주신 ‘이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는 것, 그것이 바로 천국 시민의 마땅한 삶의 방식입니다.

넷째, 당신의 이주가 ‘위대한 연결’이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적용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을 보십시오. 그것은 복음을 위한 거룩한 ‘이주의 여정’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주한 곳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결되고, 도시와 도시가 복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의 이주는 세상을 잇는 ‘위대한 연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이주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트남에서 온 청년은 이곳 장유에서 베트남과 한국을 잇는 살아있는 다리가 됩니다. 서울에서 장유로 이사 온 가정은 수도권과 지역사회를 잇는 소통의 창구가 됩니다. 이처럼 모든 이주는 그 자체로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 이주’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천국을 향해 살아가는 이 영적인 이주의 삶 역시, 세상을 잇는 위대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이주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 곁의 이웃에게 다가갈 때, 우리는 바울처럼 위대한 연결자가 됩니다. 우리의 작은 친절과 환대가 한 사람을 공동체와 연결하고, 절망의 사람을 희망과 연결하며, 마침내 하나님과 단절된 영혼을 영원한 생명과 연결하는 놀라운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